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윌리엄 매킨리 (문단 편집) === 재임기 === 대통령이 된 매킨리는 공약대로 높은 관세장벽으로 보호무역을 펼쳤고 금본위제를 정착시켜 나갔다. 하지만 매킨리 정권 시절 최대의 사건은 바로 [[1898년]] [[쿠바]]를 둘러싸고 [[스페인]]과 벌인 이른바 [[미국-스페인 전쟁]](미서전쟁)이었다. 당시 [[쿠바]]에서는 혁명가들이 식민 통치를 벗어나기 위해 한창 봉기하고 있었는데 미국은 클리블랜드 정권 시절부터 중립 정책을 펼쳤고, 갓 당선된 매킨리 역시 전임 [[그로버 클리블랜드|클리블랜드]]처럼 중립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대중 여론은 쿠바 혁명가들에 대한 지지가 강했으며 상원의 주전론자들도 쿠바 혁명가들을 지지했다. 이러던 중 1898년 2월 15일 아바나 항에 정박한 미국 군함 [[메인]] 호가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수십 명의 미국 수병이 죽거나 다쳤는데 언론과 대중 여론은 이를 스페인군의 소행으로 단정하는 분위기였고, 연장선상에서 스페인과의 개전 여론이 거세게 타올랐다.[* 흔히 보일러실 폭발이 진짜 원인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1998년]] 메인호 폭발 100주년 기념으로 이루어진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조사에서는 선체가 안쪽으로 휜 것이 확인되었으며 여러 면에서 [[기뢰]]로 추정되는 외부충격에 의한 침몰로 추정된다는 결과가 나왔다. 즉, 뭐라 속단할 수 없는 [[미스테리]]다.] 매킨리는 [[스페인]]에 최후통첩을 보냈는데 스페인은 무력 충돌을 원치 않았기에 의외로 미국의 요구 사항을 고분고분하게 대부분 수용했다. '''하지만''' 기업가를 등에 업은 매킨리는 사실 첨부터 협상에 나설 의지가 없었고 의회에 전쟁 선포 문서를 보냈으며 곧 의회는 전쟁을 선포한다. 이 전쟁은 5개월 남짓 계속되었는데, 아무래도 위치상 보급선 위치도 훨씬 가까운 미국의 승리로 끝난다. 미국에서는 이 전쟁을 '소풍같은 전쟁(War like a Picnic)'이라고 부를 정도. 하여튼 전쟁의 승리로 미국은 쿠바를 장악했고, 거기에 대해 스페인으로부터 [[푸에르토 리코]], [[괌]], [[필리핀]]을 할양받았다.[* 이때 메킨리는 변명이랍시고 [[백악관]] 복도에서 필리핀을 해방시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다시 식민화시키라곤 안하셨단다.--] 메인 호의 폭발로 인해 미국의 식민지가 이렇게 늘어난 것. 하지만 당시 독립운동을 벌이던 필리핀인들은 자신들의 [[필리핀 제1공화국|정부]]를 세워 미국 지배를 인정하지 않았고, 매킨리는 이를 사뿐히 무시하고 무력으로 [[미국-필리핀 전쟁|제압했다.]] 필리핀 뿐만 아니라 새로 얻은 식민지 주민들에 대해서도 일부 공화당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고압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1900년]] 대선에서 대통령 후보로 재출마했고 부통령 호바트가 이미 사망했기에, 당시 한창 명성을 얻고 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부통령 후보로 삼아 대권을 노렸다. 민주당은 다시 [[윌리엄 J. 브라이언|브라이언]]을 후보로 내세워서 매킨리의 고압적인 제국주의 정책을 비난했다. 하지만 공화당은 "우리는 수천만에 달하는 식민지인들을 에스파냐 제국주의의 압제에서 해방시켰다"고 선전했는데 이 선전이 먹혀서 대통령 재선에 성공했다. 표차는 훨씬 커졌고, 다행이라 할지 미국 재벌들의 후원은 많이 줄었다. 실제로도 초반 박빙이었던 1896년과 달리 1900년 대선은 선거 초반부터 꽤나 여유있게 매킨리가 앞서 나갔기 때문에 공화당 측에서 이전만큼 선거운동을 많이 하진 않았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